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2)

김성민 0 7,090 2007.03.24 00:29
* 캄보디아의 어느 선교사가족의 간증

한 선교사부부는 현지인 학교에 자기의 딸을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현지인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것은 우리나라 부모들의 마음에는 큰 고통입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국제학교에 자녀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선교사로서 한국교회 성도들이 보낸 선교비를 자녀교육에 많은 부분을 지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현지인 학교에 보냈습니다. 비록 국제학교만큼 양질의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부모의 믿음과 하나님의 보살핌으로인해 그 딸은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학적인 성취도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크메르어는 현지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물론 한국어도 전혀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1997년도에 훈 할머니가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말을 깡그리 까먹은 그녀를 위해 그 선교사의 딸은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방영된 방송을 캄보디아 총리 훈센이 그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크메르말을 잘해서 감동을 받은 훈센은 그녀를 공관에 초청했고 소원을 물었습니다. 유학을 가고 싶지만 선교사인 부모가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갈 수 없다고 하자 훈센은 그녀를 캄보디아 국비로 미국으로 유학 보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모의 헌신과 믿음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위안부 훈 할머니-자료퍼옴>

한국인으로 일본인의 아내였던 훈 할머니. 그는 망자(亡者)처럼 생사를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삶의 수렁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잊어버려야 했다.

1942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와 이역만리 캄보디아에서 보낸 지옥 같은 날들.
1945년 일본군 장교 다다쿠마 쓰토무를 만난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난생 처음 겪는 ‘짐승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다다쿠마가 지어 준 이름은 하나코(花子). 하지만 꽃처럼 화사했던 여인에게 그가 남긴 것은 아비 없는 핏덩어리와 굴욕의 세월이었다.
일제가 물러가자 주둔한 프랑스군은 일본과 관련된 사람은 모조리 처형에 나섰다. 이어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즈는 외국인이라면 무차별 학살했다.
이에 만삭의 몸을 이끌고 정글로 피신한 여인은 진흙탕에서 첫딸 카오를 낳았다. 누가 들을까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세상에 내놓았지만, 어미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가엾은 딸이었다.

이런 와중에 모진 목숨이나마 부지하기 위해선 이름도, 말도, 가족도, 고향 산천도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래도 생명은 끈질긴 것이어서 여인은 캄보디아인과 재혼해 두 딸과 아들을 낳았다. 이 역시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은 킬링필드 때 잃었고, 충격을 받은 남편은 주정뱅이가 돼 평생의 짐이 됐다.

다행히 훈 할머니는 한 한국인 사업가에 의해 뒤늦게나마 발견돼 1997년 8월 4일 고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게 됐다. 55년 만의 귀국이었다.

하지만 고향에서도 그는 편히 쉴 수 없었다. 이듬해 5월에는 캄보디아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길에 올랐지만 노령에다 한국말까지 잊어버려 생활에 큰 불편이 따랐다.

결국 훈 할머니는 몇 개월 만에 캄보디아로 돌아갔고 2001년 2월 15일 “유해만은 고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한 맺힌 이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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