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김성민 목사 1 7,799 2007.10.08 08:19


본문 : 룻 1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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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2007.10.09 01:14
  믿음의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룻기1:1-6

우리는 며칠 전에 추석 명절을 지냈습니다. 여기 와서 새롭게 겪게 되는 또 다른 경험은 아직도 추석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추석과 같은 미국의 명절인 Thanksgiving day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인사합시다. Happy 추석!

명절을 보낼 때마다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저도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 드렸습니다.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 농사는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최악의 흉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농사경험이 있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농사는 1년 가까이 피땀 흘려야 하는 수고로운 일입니다. 몸이 연약하신 저희 어머니는 여름에 농약 뿌리는 일을 힘들어하셨습니다. 태양 볕이 직각으로 내리 쬐는 한 여름날에 아버지와 농약을 칠 때는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곧장 며칠을 드러눕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피땀 흐리며 고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쭉정이만 널려있는 들녘을 보았을 때 그들의 마음은 허탈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 밖에 일들을 접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땀방울이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만납니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애를 써보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불행의 늪으로 빠져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본문에서 이런 일을 겪고 있는 한 가정을 만나게 됩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시고 보호하시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떡집’, ‘양식의 곳간’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들레헴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것입니다. 양식이 있어야 할 곳에 양식이 떨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들은 굶주렸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그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밭에 나가서 한알의 밀알이라도 건지기 위해 또 뒤지고 또 뒤져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말라비틀어진 쭉정이만 움켜지고 주저앉아있기 일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불현듯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멀리 요단강 동편에 황금물결처럼 펼쳐진 모압의 들녘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겠습니까? 아, 저 곳에 가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리적으로 베들레헴에서 모압평지가 내려다보입니다. 베들레헴은 고도 1000m정도에 위치해 있고 지대가 낮은 모압 평지는 요단 강 저편에 펼쳐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땅에서 고향을 일구고 살았던 그들은 그곳을 등지고 모압으로 떠납니다. 모압에서 그들은 열심히 살아갑니다. 자신의 땅이 없었기 때문에 품을 팔아서 양식을 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이제 더 이상 굶주림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기치 못한 가장의 죽음이 또다시 그 가족을 슬픔의 구덩이에 몰아넣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남은 자들이라도 잘 살아야죠? 그들은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역경을 이겨내려고 애써봅니다. 어느덧 두 아들이 결혼할 때가 되었고 그곳의 여인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살아 진 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또 웬일입니까? 그들의 행복도 잠시 더욱 큰 불행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아들들의 가정에서는 10년이 넘도록 자녀들이 생기기 않습니다. 그러다가 까닭 없이 두 아들이 죽고 맙니다. 결국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이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하는데, 남편뿐만 아니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텅빈 마음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행을 겪었던 한 가정과 한 여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불행한 일을 겪게 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정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2가지의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고난과 불행한 일은 찾아온다.
고난과 역경은 어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마치 비가 오면 비에 노출된 사람은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누구나 젖게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완벽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문화와 파괴된 환경이 우리에게 역경을 주기도 합니다.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거나 재산을 잃어버립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문명의 혜택인 자동차로 인해 불구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불치의 병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그의 백성들도 예외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삶의 정황입니다. 신앙의 문제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기도의 여인입니다. 평생을 날마다 철야기도하며 사신 분입니다. 기도 중에 왜 풍성한 수확을 위한 제목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흉작을 만났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어버린 아픔을 겪은 분이 있습니다. 그의 가족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경을 경험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처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불행한 일을 겪었을 때, 더러는 그것이 마치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처럼 정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오미가 가나안 땅에서 겪었던 굶주림과 경제적인 역경은 인간의 지혜로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셨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모압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은 오히려 더욱 큰 고통만 남겼습니다. 나오미의 마음은 고통으로 텅비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으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하였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두 아들들이 모압여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당하였다고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되면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는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방여인이었던 룻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가장 흡족해 하셨던 다윗 왕의 증조모였습니다. 룻을 통해서 그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지 않습니까? 사실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더욱 고통을 주는 것은 주변사람들의 판단이나 정죄하듯이 내뱉는 말들입니다. 특히 믿는 우리들 중에 성경의 한 구절을 들이대며 그 상황을 판단할 때는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힙니다.

제가 어느 선교사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LA이의 한 교회에서 아이의 자폐증 증세로 고생하는 어느 한 가정에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은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집이었습니다. 남편은 좋은 직장과 높은 직책을 지니고 있었고 부인은 미모가 뛰어나고 정숙한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아니 때문에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이 교회에 숨기고 있다가 어렵게 심방 요청을 해서 목사님과 장로님이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장로님이 위로의 말을 전한다고 한 것이 그만 화근이 되었습니다. 장로님이 이르기를 “하나님은 참 공평하십니다. 이렇게 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 이런 불행을 겪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부인의 마음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절망의 늪으로 더욱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상의 삶을 통해서 겪게 되는 인생의 풍랑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이치라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보기에 믿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복음을 위해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후11:23-28.  매 39대를 5번, 태장 3번, 돌아 맞음, 세 번 파선, 강도, 거짓형제의 위험, 동족들과 이방인들의 위험 ...

2. 불행의 끝은 반드시 온다.
우리가 역경에 처한 순간에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불행의 순간이 언제나 끝이나나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벗어나고 싶어서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끝은 옵니다. 해마다 흉년이면 누가 농사를 짓겠습니까?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가지 고통의 나날이라면 어느 누가 삶의 의욕을 느끼겠습니까? 불행의 순간은 인생의 항해에 현실이라는 배에 잠시 부딪히는 풍랑과도 같습니다. 곧 구름이 걷히고 풍랑이 잔잔하게 됩니다.

6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습니다. 흉년이 들었던 그 땅에 다시 수확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땅의 백성들에게 굶주림의 고통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권고하신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백성들의 삶에 방문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자연의 질서를 회복시키시고 백성들의 땅에 적절하게 비를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백성들, 이리저리 방황하며 살아가는 백성들,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동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백성들과 그 땅에 다시 임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과 불행한 일은 겪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는 아닙니다. 태초에 인간들이 살았던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다. 모든 순간이 행복하였고 기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찬양을 부르며 모든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잊어버리고 기뻐하는 그 순간보다 훨씬 즐거웠습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죄악으로 물든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불행한 일을 만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돌아보고 계신다면 우리는 인생의 여정 중에 만나는 역경은 비빔밥에 곁들여 먹는 고추장소스와도 같습니다.

고난과 불행한 일을 접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부터 종말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서 다시리신 후부터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 즉 새 땅과 새 하늘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끝이 있다는 것은 아주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고난과 불행한 일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오미는 어떻게 했습니까?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합니다. 하나님께서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다시 주신 그 땅, 레헴(양식)이 가득 채워져 있는 곳간,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모압 땅에서 정착하며 살았던 나오미에게는 그녀의 가정에 고통을 주었던 굶주림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양식 때문에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향에서 겪었던 영혼의 굶주림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 그녀의 삶에 불어 닥친 인생의 풍랑으로 그의 마음은 지치고 피곤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믿음을 가지고 강건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도 그렇게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녀의 영혼이 말라있었고 영적인 삶이 폐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텅빈 마음을 채워줄 곳은 오직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곳, 바로 영혼의 고향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오미처럼 믿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입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신앙 생활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뿔뿔이 흩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본 고향은 어디입니까? 가나안 복지,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본래 영혼의 고향이 없었습니다. 죄의 사생아요, 방랑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희생재물로 삼으셨고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본향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야할 영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이 고향은 갈대와 우르라는 타락한 문화 속에서 살아갔던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가족을 인도하셨던 땅입니다. 후에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빠져나와 정착하며 살았던 땅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땅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믿음의 자손들이 살아가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죄의 노예로부터 빠져나와 영혼의 안식을 누리는 땅입니다. 비록 믿는 우리들이 이 땅의 타락한 문화와 환경 속에서 빗어지는 여러 가지 역경과 고난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본향, 하나님 나라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 나라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그 나라에서 떠나게 하는 유혹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역경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더욱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 돈을 좇아 그 나라를 떠납니다. 마음이 외롭고 곤고할 때 성적인 유혹을 좇아 그 나라를 떠납니다. 자녀들 때문에 그 나라를 떠납니다. 학벌과 명예를 위해 그 나라를 떠납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영혼이 닻을 내리고 있는 본향을 생각합시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맏형인 예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그분의 거룩한 영이 우리를 자녀답게 살도록 인도하는 그 나라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던 간에 고향은 돌아오는 이들에게 그 품의 넉넉함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우리 영혼의 닻이 그의 나라에 단단히 박혀서 산다면 어떠한 인생의 풍랑을 만나더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선장되십니다.
우리 중에 새롭게 우리 주님으로부터 영혼의 고향을 선물 받은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마시고 이곳에서 닻을 내리십시오. 고향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풍성한 영혼의 양식을 맛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