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죽음

김성민 목사 1 7,218 2007.03.20 12:53


본문 : 로마서 5장 6-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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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2007.03.22 02:01
  한 청년의 죽음
로마서 5:6-11

항상 이 맘 때가 되면 생각나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2001년 1월 26일 일본에서 있었던 한 청년의 용기있는 행동을 보고서 근래에 느끼지 못하는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감동은 비단 우리 한국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온 국민이 그 청년의 행동에 찬사를 보냈고 일본 국민들 또한 그 청년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전후세대에 잃어버렸던 참다운 용기를 보여 주었다고 전 일본 사람들은 감동하였던 것입니다. 중앙신문과 방송은 대서특필했고 조문객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국무총리까지 그의 죽음 앞에 찾아와 애도를 표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한 일본인 취객이 지하철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철로로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많은 무리들 중에 두 사람이 철로로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 내렸습니다. 한 사람은 40대의 일본인 사진사였고 한 사람은 26세의 젊은 한국인 유학생, 이수연 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전동차에 치어 세 사람 모두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 중에 한사람이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수연 씨는 1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와 연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가족 모두가 일본인이라면 치가 떨리는 원한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고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할머니는 행방불명되어 원인 모를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 내렸습니다. 한 생명이 죽어간다는 생각에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내렸던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죽지 말아도 될 죽음이었습니다.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사람의 죽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한 취객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자기 실수 때문에 발생된 죽음입니다. 그렇게 죽는다 하여도 별로 아쉬워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모습을 보면 보통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술에 취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일을 끝낸 후 동료들과 기분 좋게 한두 잔 마셨을 것입니다. 아니면 힘든 일이 있어서 그것을 달래보고자 술을 마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마음은 공허했고 그의 영혼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그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자신이 가눌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감, 직장이나 사업장에서의 스트레스, 좀더 나은 삶을 위해서 발버둥쳐보지만 다람쥐 챗바뀌 돌 듯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항상 제자리 인생인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서 좌절감이나 자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을 해소할 수 있는, 그래서 그런 인생의 무게를 잠시라도 벗어버릴 수 있는 다른 대용물을 찾아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술에서 그것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공허함이나 영혼의 갈증을 술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결국 술기운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철로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이라는 곳에 다섯 남편을 두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영혼의 갈증을 육적인 욕망을 통해서 채우려 했습니다. 이미 다섯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했습니다. 이제 결혼을 해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했는지 굳이 결혼하지 않고 대충 다른 한 남자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그 여자를 창녀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수이야기를 하자 ‘주여 나도 좀 그 생수를 주십시오.’라고 다급하게 요구를 합니다. 아무리 성욕으로 갈증을 채우려 한들 그 영혼의 목마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때라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하는 사람은 매국노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당된 세금을 정부에 바치고 나면 그 외에 것은 자기가 착복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영혼의 갈증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리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자기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세금을 많이 거둬드려 자기가 착복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된들 그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타들어가는 목마름은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고 종교지도자로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지위와 명예가 그 사람의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저녁에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목마릅니다. 영혼의 갈증이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하더라도, 지위와 명예와 학식이 높다하더라도 그 갈증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럭저럭 자기 분수를 알고 평범하게 살아간다하더라도 영혼의 목마름을 시원스럽게 해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스스로 해결하려고, 목마름을 채워보려고 발버둥치는 것들이 우리를 짓눌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인생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2.두 번째로 일본인의 죽음입니다. 나이가 50을 바라보며 또한 사진사로서 안정적인 경제적 수입과 단란한 가정생활을 누리며 어느 정도 인생의 맛을 알 수 있었던 그는 철로로 뛰어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평범한 삶에 만족한 그에게 목숨을 담보로 희생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구하기 위해 철로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용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별반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같은 동족을 살리기 위해서 취했던 행동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본문에도,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은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은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국민이나 친척 또는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더러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 간에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3.하지만 이수연 씨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같은 민족이 아닌 일본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바친 죽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일본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아직도 껄끄러운 민족입니다. 우리에게 압제의 상흔이 치유되지 못하고 원한으로 남아있는 민족입니다.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그런 민족입니다. 더욱이 이수연 씨 가족에게는 직접적인 고통을 주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연 씨는 그가 원수처럼 여기는 한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수연 씨의 죽음은 일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
2000년 전 한 유대인 청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만드시고 우주를 창조하신분이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구주이십니다. 그런 분이 하늘 보좌의 영광스러움을 다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지 말아야 할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그의 목숨을 저주의 처형대에 아낌없이 내놓았던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 형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죄를 지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공의일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에 올라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죄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대가로 지옥에 갈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모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죽지 않아도 될 죽음을 취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은 아주 치욕스럽고 저주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곧 저주받은 사람을 뜻합니다.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도 저주를 인정하는 그런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수도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여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53:3-9)

예수님은 그 치욕스럽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죄악의 사슬을 벗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죄악의 굴레 밑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을 자유와 기쁨이 가득한 삶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무한하신 그의 사랑과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공허함과 영혼의 목마름이 시원하게 가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예수님께 맡기고 그 분을 진실로 신뢰한다면 여러분에게 진정한 안식과 평안과 소망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또한 그 영혼의 문제도 무더운 여름날 땀에 적신 몸을 얼음물 한잔으로 시원스럽게 해갈하듯이 인생의 공허함과 영혼의 목마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원스럽게 해소가 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성경의 인물들 수가성 여인, 삭게오, 니고데모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공허함, 영혼의 갈증이 모두 시원스럽게 해결되었습니다.
창녀였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도 예수님을 만난 후 성적 욕망으로 채우려 했던 영혼의 갈증을 단번에 해소시켰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수였던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그 수가성 여인은 그가 동네에서 창녀 취급받은 사람이라는 것도 까마게 잊어버리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사람들에게 참 생명수 되신 메시야를 만났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또한 돈으로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과 동족을 착취했던 삭게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참 생명수되신 메시야라는 것을 알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토색한 것의 4배나 갚겠다고 결단을 했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수를 공급받은 후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죽은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장사지내는 일을 돕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인생의 공허함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죽음 앞에서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저의 삶을 뒤돌아 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실 회사를 그만 두면서 전적으로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기기로 결정하고 그분을 신뢰하면서부터 내 영혼 깊은데서 솟아나는 기쁨과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왜 진작 생명수 되신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까? 인생의 문제를 물거품처럼 사라질 유한하고 허망한 것에 의존하여 해결하려고 그리도 발버둥치며 쫓아다녔을까? 이제 저에게 있어서 영원한 생명수 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는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석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취객처럼 죽어도 너무나 당연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죄인들이기에 죽음에 처한다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무한하신 사랑이 우리가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축복이요 기적입니까? 이러한 은혜와 축복을 왜 마다하고 허망한 것에 집착하고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질 것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것이 여러분으로부터 사라질 텐데, 그리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텐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삶의 중심에 두십시오.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인생의 가장 값진 선물이 되길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은 매 순간의 삶이 가장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경제적으로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그 분 한분만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오히려 그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천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495장)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이수연씨처럼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여러분 자녀 부모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허망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인생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맛보는 사람만이 부활의 소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누리는 천국의 영광을 꿈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생명을 위해 목숨을 던져봅시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참 생명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것 저 것 계산하지 맙시다. 잃어버린 영혼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에게 닥치는 대로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다면 잠시 어려움과 고난이 따르겠지만 장차 올 영광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롬8:18).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영혼 구원의 사역에 함께 헌신한다면 그 헌신은 결코 죽음처럼 지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큰 상급으로 보상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