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런 햇볕

김성민 2 6,962 2007.10.10 06:33
지난 토요일 제가 보고 싶었던 영화가 DVD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주일에 설교가 있어서 토요일에는 포기했지만, 주일 저녁에 피곤한 몸을 제쳐놓고 끝까지 보았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이다.
주인공 이신애가 남편을 교통사고로 보내고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와 살게 되는 과정에서 겪는 일을 그리고 있다. 남편과의 사별의 아픔을 뒤로하고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면서 그럭저럭 잘 정착해 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들이 유괴당해 사체로 발견되자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을 빠져들게 된다. 마치 그 전부터 그녀를 전도하려고 했던 약사를 통해서 어느 개척교회의 부흥회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받고 집회에 참석하게 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 집회 이후에 이신애는 ‘돈독한 기독교인’이 되어 자기에게 불현듯 찾아온 고통을 이겨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고픈 마음이 들어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교도소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 죄수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만 실신하고 만다. 그 이후 그녀는 자기의 허락 없이 용서한 하나님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한다.
 
보고난 이후의 느낌은 이것은 기독교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십계’와 같이 스펙터클한 감동을 주거나, 주기철 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저 높은 곳을 향하여’와 같이 마음을 저미는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항상 나의 뇌리를 감싸고도는 많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단상들이 그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기에 너무나도 겸연쩍다. 마치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세상에 노출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심방예배를 드리거나 특히 구역예배를 드릴 때 주인공이 돌을 던지는 장면을 기독교를 모독하고 있다고 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분명 기독교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영화가 설정해 놓은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해야만 한다. 주인공에게 닥친 고난 때문에 하나님이 부정적으로 비춰지거나 장로가 주인공의 성적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항하고자 의도하는 주인공은 장로에게 몸을 내주는 장면에서 하늘을 향해 “너 보고 있지”라고 말하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있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그 부정적인 이미지는 주인공의 삶에 비밀스런 햇볕(‘밀양’의 뜻)을 비춰주심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뀌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주인공 옆에 따스하게 내려 앉아있는 햇볕을 오랫동안 비추고 있다. 하나님은 햇빛을 비추는 것까지 그의 섭리를 나타내신다는 약사의 말이 잘 해석되고 있다.

또한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쉽게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교인들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쉽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초월적인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만 사신 분이 아니다. 저 멀리 하늘에서 이 낮고 낮은 세상의 만물과 인간을 그의 초월적인 능력으로 다스리시고, 인간의 자질구레한 삶에는 간섭하시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에 대하여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하여 우리의 내면의 인격과 삶에 대해서는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원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인간의 삶이 확연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두 가지 형태의 신앙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만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으로 나가던가 아니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의지하여 인간 스스로 이 세상을 발전시키고자하는 진보주의 신학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러한 신학은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견해이다. 그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안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교회 밖에서 교회의 좋지 않는 모습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람보고 믿지 말고 하나님만 보고 믿으라고 한다. 물론 교회 안에서는 이제 막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와 신앙 연륜에 상관없이 성숙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인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본체이자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으로 와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가 우리이다.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이고 그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다.

여하튼 우리는 모세와 같은 이적을 베푸는 영화를 세상에 보이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주기철 목사님과 같이 우상숭배에 대항하며 초개와 같이 자신을 드리는 신앙을 원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의 일상에서 한 영혼에게 개입하시는 너무나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믿음의 영웅’보다는 늘 불어 닥치는 현실의 풍랑에 아파하고 슬퍼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이다. 믿음 없이 살아가다가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 회심하게 된 어느 성도의 신앙 간증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꾸밈없이 비기독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더러는 성도들의 삶의 문제와 코드가 맞지 않는 목회현장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비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괴범이나 주인공이 생각하는 ‘구원’과 ‘용서’와 대해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바로잡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말부분에서 끝내는 그 어떤 것도 가릴 수 없는 햇볕이 주인공의 삶에 비집고 들어가게 된다. 그 비밀스런 햇볕의 따스함을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이 느꼈을 것이라고 믿는다.

Comments

박선희 2007.10.11 11:10
  이영화가 그런 영화 였어요?
하도 나쁘게만 이야기들을 해서 보고 싶지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지를 않았었는데.....
기회가 닿으면 한번 봐야겠네요.
신난슬 2007.10.12 04:17
  저도 오늘 이 영화를 봤는데 마침 이렇게 목사님 글이 있네요. 글을 읽고 나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많은 감정이나 생각들이 정리가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