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교회연합 제직훈련 웤샾 교재

이정근 0 6,763 2009.02.27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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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직이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봉사하기 위해 교회마다 제직을 선택하고 제직회를 조직하여 교회를 봉사하게 된다.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전도사, 서리집사를 제직이라 부른다. 제직 중에 목사, 전도사를 교역자라 부르고 제직이라면 장로, 권사, 서리집사를 의미한다.

2. 제직을 세우는 이유
교회에서는 제직을 세우는 이유를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날마다 교인이 증가함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시비가 일게 되었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짐으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이유로 첫째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고 둘째는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력하게 하기 위해 일곱 명의 집사를 선택하였다.(행7:1-7)

3. 제직의 자세
제직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직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더 중요하다. 진실하게 믿고 아름답게 봉사하고 보람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어떤 직분을 맡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봉사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1) 청지기로서의 자세
청지기란 헬라어에 “오이코노모스”라고 하는데 신약에 약 10회 정도 사용되었다. 많은 재산과 수입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는데 이를 청지기라고 부른다.

가) 청지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도 하나님의 것임으로 우주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또한 바울은 교회도 하나님의 것이라(고전1:1)고 했다.

나) 청지기는 일을 맡은 자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잘 관리하게 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맡은 청지기다.

다) 청지기는 주인의 대리자이다.
요셉이 주인집의 가정 총무가 되어 주인의 집과 소유를 주관하였으니 청지기는 주인의 대리자이다.(창39:4-5)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 중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일군의 삯을 주라고 하였으니 청지기는 주인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주인의 대리자이다.(마20:8) 주인이 엄연히 있으나 주인으로부터 모든 일을 위임 맡은 주인의 대리자이다.

라)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따라 일하는 자이다.
청지기는 언제나 주인의 뜻대로 맡은 것을 사용할 의무가 있다. 주인의 대리자로서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고 주인의 뜻을 따라 일하되 주인에게 유익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마25:14-30) 그러므로 제직인 청지기는 자기가 맡은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마) 청지기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다.
청지기는 재산과 사람을 맡아 관리하는 자이지만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이라고 하였다.(고전4:1)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인지 드러내려고 복음을 전파하는 청지기라 하였다.(엡3:9)

제직은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도록 돕는 청지기이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딤전3:15) 그러므로 청지기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자이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각양 은사를 맡은 자로서 서로 봉사해야 한다.(벧전4:10) 그리하여 자기가 맡은 은사를 하나님을 위하여 잘 활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쳐야 한다.


2) 주인으로서의 자세
제직은 자신을 알고 제직답게 행동하고 살아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 책임질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주인은 잘 된 일이나 잘못된 일이나 책임 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책임을 아는 것이다.

나) 자기의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제직은 저마다 자기에게 맡겨준 분량이 있다. 집사는 집사의 직분, 장로는 장로로서의 분수가 있다. 제직이 자기의 분수를 망각하고 행동할 때 반드시 말썽이 일어나고 불화의 원인이 된다. 제직이 자기의 분수를 잊을 때 교만해지고 자기 자랑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5:3)

다) 제 사명을 자각하는 제직이 되어야 한다.
주인 의식을 가진 제직은 자기 사명을 다한다. 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사명의식의 결여가 종이 주인노릇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제직으로 선택 받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엄숙한 질문에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

3) 기도하는 자세
기도는 신앙의 생명이며 호흡이다. 기도하지 않고 신앙을 유지 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는 제직이 그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없다. 기도가 없이는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기도가 아침을 여는 열쇠요 하루를 닫는 열쇠가 되게 해야 한다.
기도는 창조주와의 대화이다.


가) 정신을 집중시켜 기도해야 한다.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위하여 기도할 때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행9:40)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 얼굴과 의복에서 광채가 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이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는 것은 정신을 집중시켰다는 말이다.

나)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뜻을 살펴 시작하고 시작했으면 응답을 듣기까지 구하여야 한다. 기도하다 낙심하지 않는 비결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는데
있다. 확신이 없으면 낙심하기 쉽다.

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살전5:16)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않겠다.”고 했다.(삼상12:23) 기도가 호흡과 같다면 기도를 쉬지 않아야
신앙이 숨을 쉰다.

라) 할 수 있는 한 새벽에 기도하라.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새벽시간을 놓치지 말고 새벽에 기도하라. 기도의 사람들은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붙들라.(시46:5)

*****기도를 위한 Tip*****

*기도자가 자신을 돌아보는 4가지 원칙
첫째,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이 정말 하나님의 일인지 돌아본다.
둘째, 기도자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돌아본다.
셋째, 응답의 때는 나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임을 알아야 한다.
넷째, 인간의 도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네 가지 통로
a)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 돌리는 찬송(행2:47)
b)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눅11:1-13)
c)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행17:11)
d) 예수님을 기념하는 성찬식(고전11:26-29)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부탁한 것 세 가지
a)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이렇게 기도하라.(마6:9-11)
b)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c) 성찬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마26:26-29)

**********기도 응답 받은 죠지 뮐러의 기도 수칙**********

ㄱ. 예수님을 의지하라.
축복을 간청하기 위해 유일한 근거로 주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요14:13, 14, 15:16)
ㄴ. 죄를 버려라.
우리 삶에 알려진 모든 죄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에 찬동하지 않으신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ㄷ. 믿어라.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약속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기도가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다. (히6:13-20 , 요일2:4)
ㄹ. 인내로 기도하라.
농부가 오랫동안 참으며 추수할 때를 기다리듯이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며 기다려야 한다.(요18z;1-18, 약5:7)
ㅁ.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라.
우리는 경건한 동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요일5:14, 약4:3)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면 다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자신의 뜻을 포기하라.
어떤 문제에 처했을 때 자신의 마음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 스스로 뜻을 갖지 않는 상태에 이르도록 무단히 노력하라.(욥12:2)

둘째, 느낌을 신뢰하지 마라.
느낌이나 인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사람은 필경 망상과 착각에 빠지기쉽다.

셋째, 성령과 말씀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혹은 말씀의 연관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해야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도하신다.

넷째, 환경을 고려하라.
하나님께서 섭리로 주관하시는 환경을 고려한다.

다섯째, 하나님의 뜻을 보여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다.

여섯째, 결정했을 때 마음이 평안한 지를 점검하라.
결단을 내리고 마음이 평안하면 두세 번 더 기도하고 그 후에도 마음이 평안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라.


4) 제직이 성경을 읽는 자세

“이에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
성경은 인간의 열심과 지식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마음이 열려야 깨달을 수 있다.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마차에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저의 열심이나 지식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어서 가르쳐 주는 이가 없으니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탄식하였다.(행8:3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의 속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고 말했다. 성경은 세상 지식이나 경험으로 읽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 할 수 없다. 영안이 열려야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비로소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고백하는 시편 기자처럼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의 말씀이 꿀송이 같이 달게 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나이다.(시119:103)

가)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3:16, 17)

학생이 수업에 임하기 위해서는 교과서가 필요하듯이 믿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 읽는 것은 필수조건이다. 기도가 영적 호흡이라면 성경말씀은 매일 먹어야 할 영의 양식이다. 육의 양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자랄 수 없듯이 말씀을 읽지 않고는 신앙이 자랄 수 없다. 성경은 66권의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신분과 자격이 각기 다른 40명에 의하여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까지 가록되었는데 구약은 신약의 준비요, 근본이며,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며 결실이다.

나)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사용하여 쓰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이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통일된 일관성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구속사와 그 구속을 이룰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도 자기 자신에 관한 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눅24:25-27) 그러기에 성경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요 영혼을 구원하는 양식인 것이다.


다)성경은 날마다 읽어야 하는 영의 양식이다.
영어에서 diet란 말은 “하루의 활동을 위해 필요한 영양분”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먹거리가 풍부하여 하루에 필요한 이상의 영양분을 섭취하기 때문에 쓰고 남은 영양분이 몸에 남아 쌓이게 되어 비만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들은 영의 양식으로 하루 필요한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주었는데 이것이 만나며 그 만나는 꼭 하루에 필요한 만큼만 줍도록 명하였다.(출16:16)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내신 사랑의 편지이며(고후3:2) 날마다의 양식인 만나다. 계시록의 기자는 이 말씀을 “갖다 먹어 버리라.(계10:9)고 하였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순종하면 복을 받게 되는 것이며, 저버리면 재앙이 뒤따르는 것이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세우듯이 하루를 시작하기 전인 아침에 성경을 읽는 것이 더 유익하다.

5)제직의 전도하는 자세

신앙생활에서 기도와 성경읽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도의 생활화이다.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라도 등한시하면 신앙이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기도하면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을 읽으면 전도하게 되고 전도하게 되면 기도하게 된다. 만일 기도라는 호흡을 하고 성경이라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전도라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소화불령에 걸려 신앙이 기형으로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전도자가 되어야 하고 제직은 전도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

가)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무장이 되어야 한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성명령이다. 따라서 제직의 사명과 의무임을 자각해야 한다. 바울은 전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라는 절박감에서 전도의 불꽃을 피웠다.(고전8:16) 전도는 빚을 갚은 심정으로 하는 것이다. 빚 진 자는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제직은 누구나 복음에 빚 진자로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또한 전도는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얻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전도하면 자신의 신앙이 더욱 강해지고 교회는 부흥된다는 확신으로 임해야 한다.

나) 전도는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전도는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선교를 위해 여러 번 체포되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엄명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8-21)고 주장하였다. 스데반 집사는 전도하다 순교했고 사도 바울은 굶고, 헐벗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비방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했다. 전도에는 추수의 원리가 적용된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전도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 심을 때는 누가 많이 심었는지 적게 심었는지 분간 할 수 없지만 추수 때에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씨앗도 좋고 땅도 좋고 기술도 좋으나 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듯이 전도의 문이 열려있는 이때에 전도하지 않으면 추수 때에 낙망할 수밖에 없다.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라고 고백했듯이 제직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답하고 전도에 힘써야 한다.

다) 어부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신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전도하는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ㄱ. 고기를 잡으려면 장비가 있어야 한다.
ㄴ. 고기를 잡으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
ㄷ. 전도의 기술에는 성경말씀이 제일이다.


6) 제직이 예배에 임하는 자세

사람의 마음이 행동을 결정한다. 이 말은 사람의 마음은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내숭떨기는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그 마음은 진실된 예배로 드러난다. 예배의 바른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 원어 “아바드”와 “샤하”는 ‘섬긴다“, ”부복한다“는 뜻이고 헬라어 ‘프로스퀴네스’와 ‘라트류오’는 “경배하다”, “받들어 섬긴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말들은 모두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종이 주인 앞에 엎드리는 자세는 주인의 인격과 주인의 모습만이 들어나지 종의 모습을 들어나지 않는다. 예배란 이처럼 경배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하나님만 온전히 드러나는 행위이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이라 한다. 이것은 ‘가치’(worth)와 ‘신분'을 나타내는 ’ship'의 합성어이다. 즉 worship이란 최상의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께 드려지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다.

가) 번제

번제는 구약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제사이다. 이 제사의 특징은 제물을 조금도 남김없이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 의미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자기부인’,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자기의탁’인 것이다. 그래서 번제는 예배의 영원한 모본이다. 예배가 곧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부인, 하나님께 자기를 의탁하는 행위인 것이다.(레1:109)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드린 기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는 영원한 예배의 모범을 보여준다.

ㄱ. 준비하는 예배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흠 없는’제물을 바쳐야 했다.(레1:3) 흠 없는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바치기 전에 제물에 흠이 없는지를 반드시 살펴야만 했다. 이것은 바치기 전에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함을 의미한다. 예배는 준비되어진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준비하는 마음 없이 드리는 예배는 ‘흠’ 없는 예배가 될 수 없다.

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열랍하시도록)
예배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보기에 좋게, 인간의 기쁨을 위하여 행해지는 종교의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드려져야 한다. 그래서 나의 정성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을 때 나의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께 열랍되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에 지각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예배의 삶 가운데 어떤 부분이 거스릴 것이지를 늘 점검 할 때 우리의 예배는 정녕 사람이 보기에도 아름다워질 것이다.

ㄷ. 내가 바쳐지는 예배
번제는 드리는 자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안수란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것’을 뜻한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죄가 짐승에게 전가된다. 그 뒤에 짐승을 잡으면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짐승이 대신 받아 죽는 것이다. 그야말로 짐승은 인간을 위한 제물인 셈이다. 그처럼 제물로 인해 자기의 죄가 대속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드리는 제사는 감사와 감격의 제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고하고 그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변함없이 모든 죄를 유월(passover)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다.

ㄹ.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
번제의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자가 잡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짐승을 잡아야 함을 간과하는 것이다. 제사를 원하는 자가 제물을 바치기만 하고 바쳐진 제물을 제사장이 잡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제물을 바치는 자는 제물을 죽이는 것으로 그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인 제물의 가족을 벗기고 고기의 각을 뜨며 내장과 떨어져 나온 다리를 씻는 일까지 직접 해야 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마치면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뿌리고 각으로 떠진 고기와 잘 씻은 내장과 다리를 불 위에 올려 태우는 일만 했다. 예배는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고 성가대의 찬양을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다. 예배는 자기가 죽는 시간이다. 자기의 목을 치고 사지를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놓는 시간이다. 그날 선포되는 말씀이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 앞에서 자기의 안과 밖을 온전히 내어 놓아야 한다. 이처럼 자기가 없어 질 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일주일 동안 그를 지배한다. 이런 예배가 사람을 변화시킨다.(히4:12)

나) 소제(레2:1-2)

곡물을 제물로 하여 드려지는 소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나타내는 제사였다. 소제는 곡물을 예물로 삼되 그 곡물은 반드시 ‘고운 가루’로 빻아야 했다. 조그마한 덩어리가 있어서도 안 된다. 미세한 가루가 될 때까지 갈아야 한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 곡물처럼 자기의 생각과 뜻을 몽땅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위에 ‘고운 기름’과 ‘유황’을 더해야 한다. 보통 기름이 아닌 고운 기름, 그리고 유황은 모두 귀함의 상징이다. 또 영적으로 기름은 성령을, 유황은 기도를 위미하였다. 예배는 우리의 뜻과 생각을 말씀의 절구통에 넣고 빻는 시간이다. 조금이라도 굵은 것이 있어서도 안 되고 이물질이 들어가서도 안 된다. 이 고운 가루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곳을 아름답게 빚으셔서 우리에게 돌려주시는데 이것이 은혜가 되며 헌신과 충성이 되는 것이다. 은혜로운 예배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어니다. 수많은 교우들의 헌신과 봉사의 결과이다. 성가대원, 주일학교 교사, 안내위원, 친교담당자, 차령정리자, 등등 셀 수없는 교우들의 헌신이 어우러져 예배는 시작되고 그러한 충성과 봉사가 있는 예배가 아름다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정성과 헌신이 예배를 이룬다.
헌신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그릇에 담겨야 한다. 그래야 그 열매가 덕스럽다. 인간의 열정만으로 행하는 헌신은 오래가지 못한다. 소제물을 바치는 예물 속에 절대로 넣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누룩과 꿀이다. 누룩은 부풀리는 것이고 꿀은 그럴듯하게 만드는 사탕발림이다. 반대로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는데 소금이다. 소금은 자기가 없어져 버림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남게 하며 맛을 낸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헌신과 봉사 속에 누룩을 넣어 자기의 공적을 과장하거나 그럴듯하게 포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기 홍보이지 헌신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소금이어야 한다. 자기를 다 바쳐 헌신하되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저기가 감춰 질 때에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다) 속죄제(레4:27-31)

속제죄는 삶 가운데서 죄를 인식할 때마다 드리는 제사였다. 이는 제사장, 회중, 족장, 평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죄를 깨닫는 즉시 제사를 드리는 갓이다. 그 다음 제삿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즉시 드리는 것이다. 그 방법은 번제와 비슷하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사실을 나단 선지자가 지적했을 때 만조백관 앞에서 그것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망설임 없이 그 즉석에서 회개하였다. 예배는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예배여야 하며 예배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되어야 한다.

라) 속건제(레5:15-16, 레6:2-7)

물질에 관련된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이다. 속죄를 위한 제사라는 의미에서는 속죄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속죄제가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위해 드려지는 반면 속건제는 돌이킬 수 있는 죄에 대한 보상과 사죄를 위해 드려지는 제사란 것이다. 속건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시에 의무를 다 함으로서 예배와 삶이 일치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기뻐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범한 잘못으로 누군가 고충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실천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마) 화목제(레7:15-18)

화목제의 특징은 ‘나눔’에 있다. 번제의 제물은 모두 태워져 하나님께 바쳤다. 그 외 소제와 속죄제의 경우, 하나님께 바쳐진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제물은 제사장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화목제의 제물은 기름은 하나님 앞에서 태우고 제사장의 몫으로 정해진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제물을 바치는 자와 이웃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래서 화목제는 일종의 잔치제사였다. 화목제는 드리는 동기에 때라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로 분류되었다. 감사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릴 때, 서원제는 예물을 바칠 때, 자원제는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로 낙헌제라고 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오늘날은 구약과 같은 형태의 예배를 드리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시사 십자가 위에서 이 모든 제사를 완성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의 형태가 사라졌다 해도 그 정신만은 소홀이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 짐승을 바쳤던 구역시대보다 더욱 예배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

===켄터베리 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의 예배에 대한 정의====
예배란 우리의 모든 인격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의 진리로서 우리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그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에서 하나로 모아지게 되는 것이다.

결론 : 예배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함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이다.


결단 : 이제 우리의 예배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교회로 출발하기 전 집에서부터 준비함으로 예배는 시작되어 예배당에서 그 결정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도와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힘입어 우리의 삶속에서 예배가 마무리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삶 전체가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7) 제직의 교회생활의 자세(골4:1-6)

학생들의 원동력이 학교생활에서 나오고 군인들의 역량이 부대에서 얼마나 철저한 훈련을 했느냐에 달려있듯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얼마나 바르게 사느냐의 역량은 교회생활에서 나온다고 하겠다. 바른 교회생활이야 말고 교회 밖에서 바른 생활로 인도하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교회생활을 논하기에 앞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유익하다. 성경에서 정의하는 교회란 전통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라는 단어 ‘엑클레시아’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다.(고전1:1-3)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정의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중에 베드로에게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다.(마16:15-18) 이 말은 교회란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로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의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540년경 어거스틴의 교회위주의 신학을 최대한 발전시킨 그레고리 주교는 “교회는 미덕을 추구하고 회개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는 곳”이라고 기능적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나와 자신의 문제를 회개하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아름답게 정화해 가는 장소이고 모임이다. 마치 가솔린이 다 소진된 자동차가 정유소에서 주유를 받고 새 힘을 얻는 것처럼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말씀의 에너지를 얻어 세상에 나가 담대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의 정의를 알면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가) 주일성수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가장 큰 구분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지키느냐 아니면 공휴일로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주일성수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른 삶을 살게 하기위해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 중 넷째 계명이 주일성수에 관한 것이다.(출20:8-11)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제 칠 일째는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 이 말은 “네 자신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 지신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ㄱ.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출31:15)
하나님의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안식일을 어긴다는 말은 즉, 안식일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쓴다는 말은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시간을 도적질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ㄴ.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출31:14) ‘거룩’은 ‘구별’이란 뜻이다. 세상과 구별됨이 없이는 거룩해 질 수 없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기에 거룩한 것이다. 귀한 사람에게 무엇을 선물할 때 좋은 것으로 구별하는 것처럼 다른 날과 구별하여 지키기 때문에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 날 우리의 구별된 생각, 구별된 자세, 구별된 예배, 구별된 봉사, 구별된 성도간의 친교가 있어야 한다.

ㄷ. 반드시 예배당에 나와야 한다.(출20:23-24)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현대인의 말로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왜인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왕상5:5)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게 하실 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 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히 지켜야 한다.

나) 전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전도해야한다. 군인이면 전쟁에 나가 당연히 싸워 이겨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가 싸워야 한다. 영혼구원이 바로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자 지상명령이다. 아무리 불효자라도 부모의 유언 앞에서는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살아계실 때의 최후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들은 그 유언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물며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가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 땅위에 남기신 최후의 말씀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마28:19-20, 행1:8) 주님의 유언은 전도에 대한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먹이고, 그 말씀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말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 명령의 말씀들이 모두 사람을 살리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바로 복음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약을 주시지 않으셨다. 오직 복음이라는 약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명약으로 주셨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해졌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명약이 지금 우리 손에 들려 줘있지 않는가? 바울의 말처럼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가 받은 최후의 명령이다.

다) 봉사

세상의 법칙과 예수님의 법칙은 정 반대다. 예수님은 가장 강해야 할 때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가장 높아져야 할 때 오히려 낮아져서 가장 천하고 불쌍한 사람과 함께 하셨으니 세상의 눈으로 보면 누가 그를 구세주로 보겠는가? 그러니 실망한 저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섬김과 높임을 받았던 영웅호걸들을 지금 구세주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단 한 평의 땅도 정복한 적이 없다.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 는 커녕 그토록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길렀던 제자들에게 마저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외롭고 비참하게 죽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렇게 초라하게 죽으셨던 예수님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구원자로 받들어져 섬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상의 법칙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데 예수의 법칙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다.(아20:25-28) 섬김과 봉사의 구체적인 의미는 상대방의 수준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섬기기 위하여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수준까지 내려 오셨다. 주님께서 너희를 섬겨 줄테니 이리로 올라오라고 했다면 이미 그것은 섬김과 봉사가 아니다. 주님께서 말하시는 섬김의 자세는 섬김의 대상인 그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봉사를 의미한다. 도대체 인간이 주님께 무슨 보상을 할 수 있겠는가?(요13:4-8)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주님을 본 받아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생활에서 그 어떤 경우에라도 희생적 봉사가 빠질 수 없다. 적 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배당에 휴지라도 줍는 봉사라도 해야 한다. 교회에서 조차 봉사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나가 어떻게 봉사할 수 있겠는가?

라) 친교

바른 교회생활은 정삼각형의 모형으로 보면 위의 꼭지점은 말씀이고 아래쪽 좌우 꼭지점은 봉사와 친교가 된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말씀이 이론이라면 봉사와 친교는 이론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만일 말씀만 있다면 신학교요, 봉사만 있다면 자선단체가 되며 친교만 있다면 친목회가 된다. 그래서 교회생활은 말씀을 통한 사랑의 봉사, 사랑을 함께 나누는 친교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또한 말씀과 봉사만 강조하면 그저 타성에 젖어 무료해지기 쉬우며 봉사와 친교만 강조되면 사회의 자선단체와 같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은 이 세 가지가 항상 병행되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 우리의 신앙생활을 돕는 것처럼 말씀과 봉사와 친교는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전하시고 나서 항상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셨다. 이 때 일어난 기적이 오병이어의 기적인 것이다. 사랑의 친교는 기적을 일으킨다. 우리 형제들이 사랑의 친교를 나누게 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다. 친교를 통하여 성도가 서로 가까워지고 집안에서 상의 할 수 없는 문제들도 성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서로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성경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고 어렵고 힘든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가 있다. 그래서 성도는 교회 예배뿐만 아니라 교회의 크고 작은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때 교회생활도 활력을 얻고 신앙 자체도 균형을 이룰 수 있다.(전도서4:11-12)

마) 헌금

헌금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드려야 한다. 설령 강요에 의하여 드렸다고 해도 강요된 헌금은 헌금이라 할 수 없다. 헌금이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됨의 감사 행위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여러 가지 명목으로 헌금을 드릴 수 있지만 어떤 헌금이든지 인간의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해야 진정한 헌금이 된다. 그래서 헌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고후9:7) 특별히 진실 된 제직이면 반드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은 성도가 축복받는 비결이기 때문이다.(말3:10) 특히 헌금은 쓰다가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소득의 첫 열매를 드리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하여 드려야 한다.
헌금의 종류
십일조 헌금: 소득의 1/10을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적인 헌금
절기헌금 :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신년감사, 교회창립일 등
감사헌금 : 결혼, 생일, 취직, 입학, 졸업, 사망이나 세례를 받을 때 등
특별헌금 : 성전건축, 선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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